버리는 시간 

글/그림 이 목 일 (서양화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우리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관광버스 한 대를 내어

각 처에 떠도는 영혼들을 데리고

지리산 노고단으로 산행을 떠났습니다.

출발이 늦어져 밤 열 한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희미한 외등만 장승처럼 서있는

산밑 종점에 도착하여

긴 하품과 기지개를 켠 후, 배낭과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노고단을 향한 야간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꾸무럭꾸무럭 노고단을 향하는 모습이 수십 년 전에 본

프랑스 영화 파르티쟌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하늘은 한 없이 청명한데도 산 아래는 희한하게도 어두움으로 가득하였고

올라가는 길목 여기저기에 제법 희끗희끗 눈밭이 보이더니

중간쯤 오른 후부터는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눈빛이 반사되어 어둠으로 가득했던 산 아래와는 달리 온 사방이 푸르고

흰 세계가 펼쳐졌고 나 같은 사람에겐 참으로 처음 체험하는

기이한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싸한 겨울 산 기운은 어찌나 신선한지

산행자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은 마치 새벽을 가르는 디젤 기관차의 증기 같아 역동적이었습니다.

등선을 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찍혀 있지 않은

검푸름 그대로인데 하늘 가득히 굵은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은

별들이 빨갛게, 노랗게, 하얗게 촘촘히 빛났고

어디선가 한 줄기 실바람이라도 불면 하늘이 쨍 하고 깨어져 내려

하늘이 텅 빌 것 같아 조바심과 긴장감마저 느끼게 하였습니다.

또 어디를 보아도 백설과 수목 뿐이라

무엇이든 건드려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상수리나무를 툭 치니

하얀 별들이 우~ 가슴팍으로 떨어지면서

온통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순간 내 영혼이 세속의 온갖 때가 묻은 육신과 분리되어 눈앞에서 맴을 돌더니

천지 공간에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잠시 착시 속으로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이것이 내 육신이며 이것이 또 내 혼이란 말인가.....

참으로 아름다웠고

그때만큼은 녹슬고 황폐했던 내 영혼도 한 개의 별이 되어

한없이 웃음 짓고 있다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돌, 풀보다도 더 하찮은 이해 타산과 시기 질투에 메말라버린

사람들의 가슴이 안타까웠습니다.

천진함과 유치함을 구분 못하고

단순한 것과 기분나는 대로를 구분 못하며

진실과 위선을 구분 못하고

학교가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돈이 인격을 만들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바의 영혼들......

노고단 정상을 앞에 두었는지 안개 같은 미립자의 눈보라가 선 듯 불어오더니

대번에 시야를 가려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보이는 것은 뿌연 눈과 안개 뿐이었습니다.

누군가 안개는 그 자체가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라고 했고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상상력이 동원되고

상상력이 깊어지면 내면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며 그로 인해서

내면세계는 밝아지든지 맑아지든지

아니면 넓어지면서

생각과 삶을 여유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흰 안개 바다를 통과하며 우리는 손에 잡힐 것 같은 정상으로 말없이 올랐습니다.

침묵만 흐르는 산악,

과묵하게 걸어가는 산사람의 뒷모습이 고독해 보였고

그 고독 속에는 사람의 향기가 있어서

와락 껴안고 펑펑 울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당신과 나는 누구입니까.

그렇게도 바빴던 어제의 이 시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작두의 날과도 같은 내일의 시간으로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일순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지리산 노고단으로 산행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으로

더듬이를 잃어버린 곤충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몽환의 세계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정을 다듬고 갈무리할 자는 누구인가요.

진실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나입니까.

어둠 속으로 여명이 밝아 오고 있고

천지가 하얗게 빛을 받으며 변하고 있었습니다.

노고단 단상도 서서히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며

우리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목일 <나무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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